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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6월 22일 갈색의 폭격기 최고의 날.

복싱 얘기를 싫어하시는 분이라도 오늘 얘긴 좀 찬찬히 들어 봤으면 좋겠다. 1938년 6월 22일 희대의 빅 이벤트 하나가 벌어졌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 미국의 조 루이스와 도전자 독일의 막스 슈멜링이 맞붙은 것이다. 그런데 조 루이스는 슈멜링에게 빚이 있었다. 한창 무패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슈멜링에게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KO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루이스는 챔피언이었고 슈멜링은 도전자였지만 루이스 자신 “슈멜링을 이기기 전까지는 나는 챔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그 회심의 일전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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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경기 외적인 요소도 묘하게 불꽃을 튀겼다. 때는 바야흐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나찌 독일의 독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이에 대해 미국인들의 감정 역시 삐딱해지고 있었다. 미국의 성조기를 두른 흑인과 독일의 삼색기 아래 버틴 백인은 묘한 풍경을 자아내면서 단순한 권투 경기 이상의 흥분을 전 세계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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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독일은 전 극장 문을 닫았다고 전한다. 모두 라디오 앞에 모여앉아 자신들의 영웅이 ‘목화 따던 검둥이’ 하나를 때려 눕히고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자리의 증인이 되라는 배려(?)였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루이스를 백악관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 꼭 이기게” “염려 마십시오 대통령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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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시작됐다. 공 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갈색의 폭격기 조 루이스는 슈멜링의 몸에 그야말로 융단폭격과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슈멜링은 몸이 채 풀리기도 전에 날아드는 루이스의 소나기 펀치에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었고 그만 1라운드 끝나기도 전에 길게 드러눕고 만다. 조 루이스의 KO승이었다. 조 루이스는 이후 군에 복무하고 돌아와서도 계속 타이틀을 방어하다가 25차 방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다. 무하마드 알리조차도 자신은 루이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의 걸출한 복서였다. 그러나 그는 불운한 여생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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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흑인으로서는 두 번째 세계 챔피언이었다. 세계 최초의 흑인 챔피언은 잭 존슨이라는 이였다. 그는 토미 번즈라는 선수로부터 타이틀을 빼앗는데 당시 챔피언 토미 번즈는 자신은 흑인과는 시합하지 않겠다고 기피했다. 하지만 존슨은 악착같이 두 번 세 번 도전장을 내밀어 호주에서 경기를 했고 아주 곤죽을 만들고 타이틀을 뺏는다. 다운되려는 선수를 붙잡고 두들겨 패기도 했다. 호주 경찰이 흑인에게 떡이 되는 백인의 모습을 보도할 수 없다면서 카메라를 빼앗기까지 했다니 그 통쾌함(?)을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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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백인 도전자들을 연속부절로 물리치면서 그는 승자로서 당연한 것을 누렸다. 사자를 때려잡은 삼손처럼 포효했고 백인 아가씨들의 환호를 받았고 백인 여자와 결혼했다. 이 모든 것은 속 좁은 미국 백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첫 번째 아내가 자살한 후 잭슨이 또 백인 여성과 사귀자 이 검둥이를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었던 백인들은 잭슨을 매매춘금지법 위반으로 고발했고 잭슨은 미국을 떠나 북중미를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못된 흑인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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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 루이스의 코치들은 이 잭 존슨을 반면교사로 삼아 조 루이스를 철저히 교육시켰다. 못된 흑인이 아니라 착한 엉클 톰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지침은 눈물겨울 정도. 사진을 찍을 때 존슨처럼 웃거나 환호하지 말고 백인 아가씨와 사진찍지 말며 백인을 때려눕힌 뒤에 환호하지 말고 기자들이 뭐라고 물으면 긴 말 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는 것까지. 즉 절대로 건방져 보이지 않고 백인들에게 고분고분한 흑인으로 루이스를 이미지메이킹한 것이다. 그리고 조 루이스는 그를 충실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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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여생은 불운했다. “상대가 없어” 은퇴한 뒤 그는 알콜릭에 빠졌고 마약에도 손을 댔다. 복싱사에 남을 위대한 복서가 레슬링판에 뛰어들기도 했고 라스베가스 도박장에서 도어맨 노릇도 했다. 그러나 그 방황이 나는 이해가 간다. 그 젊었던 시절 터져나갈 듯했던 기쁨을 목구멍 밑으로 눌러야 했고 열광하는 자기 팬과 사진도 찍지 못했으며 너는 열등한 존재라는 강요를 겸손의 미덕으로 승화시켜야 했던 불운한 챔피언. 그 가슴 아픈 인내가 어찌 한 사람을 파멸시키지 않을 것인가. 잭 존슨과는 또 다른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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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대비가 있다. 그건 바로 1938년 6월 22일 루이스에게 처참하게 패했던 막스 슈멜링이다. 그는 독일의 영웅이었으면서도 나찌의 유태인 박해를 접하고 이에 반발, 이웃의 유태인 소녀를 탈출시키고 자신의 충직한 유태인 코치를 보호하는 등 다수의 유태인들을 구했다. 그는 전쟁 중 공수부대에 입대했으나 끝까지 나찌 입당은 거절했고 SS로 오라는 회유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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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앙심을 품은 히틀러는 그를 가장 위험한 임무에 골라 투입했다. 크레타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지만 슈멜링은 용케 살아남았다. 그의 부대가 미군에 투항했을 때 미군 병사들은 다투어 슈멜링에게 사인을 받아갔다고 전한다. 전후 그는 사업가로서 유복한 삶을 살았고 조 루이스가 방황할 때 경제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1981년 루이스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을 치러 준 것도 슈멜링이었다. 엄청나게 장수했던 슈멜링(2005년 100세로 사망)은 생전 아쉬운 게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 친구 루이스가 먼저 갔잖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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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나라를 자처하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세계 챔피언이었지만 스스로의 본성과 감정을 억누르고 감내하고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링 위에서보다 아래에서 더욱 힘들었을 조 루이스. 파시스트의 나라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에 용감하게 반발하고 인명을 구하고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멋진 자유인 막스 슈멜링. 이 둘은 1938년 6월 22일의 대결에서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선명히 비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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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의지로부터 격리될 때 가장 고통스럽고 그 의지를 통해 한 인간으로 설 때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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